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난징 전투 (문단 편집) ==== 일본군의 최후통첩 ==== >"아군의 손해는 매우 극심하고, 우리는 단지 피와 살로만 강철에 맞서 싸우고 있다." >---- >1937년 12월 10일, 탕성즈가 총사령부로 보낸 전보 [[12월 7일]] 마쓰이 장군은 탕성즈에게 [[12월 10일]] 오전까지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탕성즈는 이를 묵살했다. [[12월 8일]] [[일본군]]은 조롱산-막부산-자금산-우화대의 복관진지로 접근, 난징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12월 9일]] 저녁 [[일본군]]은 "일본군은 저항자에 대해서는 준열하게 관용을 베풀지 않지만, 무고한 민중 및 적의가 없는 [[중국]] 군대에게는 관대함으로 이를 범하지 않는다."라는 [[일본어]]와 [[중국어]]가 병기된 투항권고문을 마쓰이 이와네 사령관의 명의로 성내 8개 소에 투하했다. 탕성즈는 성문을 모두 막는 조치로 대응했다. 그동안 [[일본군]] 6사단, 9사단, 16사단, 114사단이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12월 10일]] 중지나방면군 참모부장 무토 아키라 대좌와 중지나방면군 참모 나카야마 야스토 소좌가 통역관을 대동하고 오후 1시까지 중산문-구용 도로에서 투항권고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탕성즈는 이를 무시했다. 이에 마쓰이 사령관은 오후 1시, 쑤저우의 중지나방면군 사령부에서 "상하이파견권 및 제10군은 난징성 공략을 속행하고 성안을 소탕해야 한다"라는 중방작전명령 제34호를 통해 난징 총공격을 지시했다. 이에 일본 육군과 해군의 합동 총공격이 개시, 4개 사단, 10만명의 일본군이 공격해왔다. 6사단이 중화문으로, 9사단이 공화문으로, 16사단이 중산문과 태평문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전차대를 앞세워 돌격했으나 독일제 [[PaK 36]] 대전차포의 대응에 격퇴되었다. 이날 오후 7시 탕성즈는 "본군은 복곽진지에서 난징 고수 최후의 전투에 몰입했다. 각 부대는 진지와 존망을 함께 하기로 결심하고, 사수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라."고 지시, 조금이라도 진지를 포기한 병력을 엄벌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각 군의 배편을 모두 운송사령부가 압수함으로 임의 퇴각의 여지를 막았다. 그리고 송희렴 휘하 36사단에게 장강 연안 경비를 강화하고 사령관의 허락 없는 모든 도강을 금지했다. 그리고 헌병과 경찰들에게 "대오를 이탈한 군인들이 제지에 응하지 않고 도강하려고 했을 때는 무력으로 저지하라."고 엄명했다. 허나 [[일본군]]의 맹공에도 [[중국군]]은 악착같이 저항하여 [[12월 11일]]까지 전선은 교착 상태였지만 [[12월 10일]] 저녁에 일본군 9사단 36연대 공병대인 와키사카 부대가 광화문 앞문의 성벽 일부를 폭파시키고 그 잔해 위에 [[일장기]]를 게양한 것을 두고 난징에 입성한 것이라고 오보가 나와 [[NHK]]를 비롯한 일본 언론들은 난징을 점령했다고 난리를 쳤고 [[일본]] 전체가 좋아 열광하었다. 곳곳에서 난징 함락을 축하하는 집회와 등불행력이 이어졌고 "황군이 용감하게 난징에 입성/적의 수도에 역사적인 일장기/각 성문을 확보, 잔적 소탕/맹렬한 시가전을 전개"[* 도쿄니치니치신문.], "남경성 위에 찬란한 일장기/감격의 10일, 수도 점령/광화문, 와키사카 부대 명예로운 첫 진입/전선 일제 돌입 시가전 전개/쓰러진 성벽 옆에서 만세"[* 요미우리 신문.], "축. 적의 수도 난징 함락/역사에 새긴 빛나는 대첩/난징 성문에 일장기/성내 남은 적들 완강히 저항/와키사카 부대의 결사적인 돌입"[* 도쿄 아사히 신문.] 등의 황당한 보도들이 이어졌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anking_celebrations.png]] || || 환호하는 일본국민 || 당시 난징의 수서문과 한중문을 공격하느라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던 제6사단 제45연대 마에다 요시히코 소위는 36여단에서 전해진 승전보에 가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뉴스를 들은 그 시각에 난징 수비군은 여전히 완강하게 저항을 계속하고, 상공에는 고사포 탄막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성벽 부근 또한 포연에 덮여 끊임없이 총소리가 들리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난징 함락은 누가 퍼뜨린 소문인가?|| ||마에다 요시히코 소위 진중일기, 1937년 12월 11일|| 사실 일본군은 난징 시내에서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성문을 폭파시킨 데에 만족해야 했다. 문제의 와키사카 부대는 오히려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내면서 중국군의 반격을 맞고 있었다. 권성욱의 중일전쟁에서는 12일 오후, 1개 대대가 광화문 안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으나 중국군의 결사저항에 교착 상태에 빠졌다고 쓰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본에선 12월 12일까지 애드벌룬을 띄우고 상점가에 일장기, 욱일기를 휘날리며 난징 함락을 축하하고 뉴스 영화 방영, "결사" 종군 기자의 보고, "육탄소장"이라는 사쿠라이 타다요시 육군 소장의 강연회 등을 가졌다. 도쿄외국어학교 학생 700명이 일장기를 휘두르며 황궁을 방문했고 곳곳에서 봉축 퍼레이드와 축하행진이 벌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